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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이치은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1년, 대한민국 서울

최근작
2022년 3월 <서울리뷰오브북스 5호>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20년. 시간은 바삐 흘러가고 내가 아주 오래전에 썼던 글이 다시 나를 소환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막 ‘불가능한 독서’를 다시 한 번 성공적으로 마쳤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자신이 쓴 글을 읽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책이란 쓸 수 있거나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둘을 다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유일한 형벌이다. 형벌을 마친 나는 무엇을 변명하려는 것인지도 모른 채 여하간 무엇인가를 변명하기 위해 이 소설의 제작자였던 과거의 나 대신 죄 없는 타인들을 소환해 보려 한다. 보르헤스의 『또다른 심문(Otras Inquisiciones)』이란 책을 보면, 그가 『청정도론』에서 인용했다는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과거의 사람은 과거에 살았지, 현재나 미래에는 살지 않는다. 반대로 미래의 사람은 미래에 살 것이어서, 과거나 현재에 살지 않는다. 현재의 사람은 현재를 살고 있기에, 과거에 살았던 사람도 미래에 살 사람도 아니다.” 과거의 ‘내’가 이 글을 썼다는 것만은 확실히 나는 ‘기억’하고 있지만, 기억 말고 나는 어떤 권리를 이 글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걸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별개의 존재라면 나는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 걸까? 자크 데리다는 『문학의 행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자가 텍스트에 기록하는 것은 자신의 소멸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글을 썼던 (아주 가느다란 내 기억에 훌륭히 입증되는) 과거의 ‘나’는 이제 완전히 소멸되었을 거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 다른 글들에 나를 소멸시키느라 충분히 바쁘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변명하고 있는 걸까? 내가 변명하려는 건 이 책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나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나에 대한 것일까? 물론 셋 다 간단한 변명으로는 씻기지 않을 큰-많은 혐의를 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우리의 죄는 천국에 있는 어머니의 책에 적혀 있을 것이다. 랭보는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실린 시, 「불가능한(L’impossible)」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아, 내 어린 시절. 언제나 큰길을 쏘다니고, 초자연적으로 검소하고, 거지의 왕보다 사리사욕이 없고, 나라도 친구도 없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었다. 얼마나 우둔한 일인가!” 성(城) 안의 바쁜 생활 핑계에 ‘권태’를 느끼기에도 그리워하기에도 지쳐버린 현재의 나는, 무모하게도 이런 글을 쓰려고 생각했던, 이미 소멸해 버렸다는 20년 전의 ‘우둔한’ 나에게 안부 인사를 보내고 싶다. 그는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방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을 거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나를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단번에…… 내 소멸을 믿지 않고, 내 알리바이를 나 대신 증명-변명하기 위해 이 글을 다시 복간하기로 결정해 주신 알렙의 주인장 조영남 형에게 감사의 말씀 드린다. 2018년 10월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권태로운 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만을 꿈꾸고 소망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팝콘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성은 기사를 통해 이러한 세상의 권태로운 자들을 차례로 죽여나갑니다. 그들은 사회체재를 유지하는 데 위험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살해 위협을 피해 새로운 인물들이 소파 씨의 아파트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그 인물이 가사에 의해 죽었을 때는 토장,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경우 에는 등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기본 얼개입니다.

로봇의 결함 1

오빠가 교실 앞 교탁에 기대서서 우리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어제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 들어.” 친구들은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아무도 어제의 자신의 알리바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일주일 전도 한달 전도 아닌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모두 당혹스럽고 또 부끄러웠다. 아무도 손들지 않자 오빠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내일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들어.” 이번엔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거의 대부분이었다. 한편 나는 좀 애매했다. 나와 오빠는 ‘우리 집’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나는 오빠가 말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늘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내겐 버릇이자 규칙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나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싫든 좋든 우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오빠도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따라서 손뼉을 쳤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일 알리바이는 훌륭히 입증됐다. 비록 어제의 알리바이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말이다. 우리의 결함은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당신의 결함은 내일을 믿지 않는 것, 나의 결함은 오빠의 동생이라는 것. 게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희박한 글들을 아무도 조르지 않아도 내일도 계속 쓸 것 같다는 거, 이를테면 이 글처럼.

로봇의 결함 2

오빠가 교실 앞 교탁에 기대서서 우리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어제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 들어.” 친구들은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아무도 어제의 자신의 알리바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일주일 전도 한달 전도 아닌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모두 당혹스럽고 또 부끄러웠다. 아무도 손들지 않자 오빠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내일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들어.” 이번엔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거의 대부분이었다. 한편 나는 좀 애매했다. 나와 오빠는 ‘우리 집’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나는 오빠가 말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늘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내겐 버릇이자 규칙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나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싫든 좋든 우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오빠도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따라서 손뼉을 쳤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일 알리바이는 훌륭히 입증됐다. 비록 어제의 알리바이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말이다. 우리의 결함은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당신의 결함은 내일을 믿지 않는 것, 나의 결함은 오빠의 동생이라는 것. 게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희박한 글들을 아무도 조르지 않아도 내일도 계속 쓸 것 같다는 거, 이를테면 이 글처럼.

로봇의 결함 3

오빠가 교실 앞 교탁에 기대서서 우리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어제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 들어.” 친구들은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아무도 어제의 자신의 알리바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일주일 전도 한달 전도 아닌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모두 당혹스럽고 또 부끄러웠다. 아무도 손들지 않자 오빠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내일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들어.” 이번엔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거의 대부분이었다. 한편 나는 좀 애매했다. 나와 오빠는 ‘우리 집’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나는 오빠가 말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늘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내겐 버릇이자 규칙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나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싫든 좋든 우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오빠도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따라서 손뼉을 쳤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일 알리바이는 훌륭히 입증됐다. 비록 어제의 알리바이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말이다. 우리의 결함은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당신의 결함은 내일을 믿지 않는 것, 나의 결함은 오빠의 동생이라는 것. 게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희박한 글들을 아무도 조르지 않아도 내일도 계속 쓸 것 같다는 거, 이를테면 이 글처럼.

로봇의 결함 4

오빠가 교실 앞 교탁에 기대서서 우리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어제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 들어.” 친구들은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아무도 어제의 자신의 알리바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일주일 전도 한달 전도 아닌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모두 당혹스럽고 또 부끄러웠다. 아무도 손들지 않자 오빠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내일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들어.” 이번엔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거의 대부분이었다. 한편 나는 좀 애매했다. 나와 오빠는 ‘우리 집’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나는 오빠가 말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늘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내겐 버릇이자 규칙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나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싫든 좋든 우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오빠도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따라서 손뼉을 쳤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일 알리바이는 훌륭히 입증됐다. 비록 어제의 알리바이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말이다. 우리의 결함은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당신의 결함은 내일을 믿지 않는 것, 나의 결함은 오빠의 동생이라는 것. 게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희박한 글들을 아무도 조르지 않아도 내일도 계속 쓸 것 같다는 거, 이를테면 이 글처럼.

로봇의 결함 5

오빠가 교실 앞 교탁에 기대서서 우리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어제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 들어.” 친구들은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아무도 어제의 자신의 알리바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일주일 전도 한달 전도 아닌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모두 당혹스럽고 또 부끄러웠다. 아무도 손들지 않자 오빠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내일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손들어.” 이번엔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거의 대부분이었다. 한편 나는 좀 애매했다. 나와 오빠는 ‘우리 집’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나는 오빠가 말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늘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내겐 버릇이자 규칙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나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싫든 좋든 우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오빠도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따라서 손뼉을 쳤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일 알리바이는 훌륭히 입증됐다. 비록 어제의 알리바이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말이다. 우리의 결함은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당신의 결함은 내일을 믿지 않는 것, 나의 결함은 오빠의 동생이라는 것. 게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희박한 글들을 아무도 조르지 않아도 내일도 계속 쓸 것 같다는 거, 이를테면 이 글처럼.

비밀 경기자

카프카는 익사하기 직전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헤험칠 줄을 안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기억력이 좋다. 그래서 나는 전에 헤엄칠 줄을 몰랐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헤엄을 칠 줄을 안다는 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안 된다. 나는 왜 기억력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글 쓰기 전을 기억할 수 없는 걸까? 내게 작은 소망이 남아 있다면 꿈 속에서 내 글을 읽어 보는 거다.

유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부재하는 실재 대신, 말들로, 다시 말들로, 실재의 거미줄 사이에서 튕겨져 나가버린, 다시, 그런 실재하지 않는, 그렇다고 말해지는, 어쩌면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말들로. 해서, 다시 말들. 기억에 남아 있는, 기억을 위한, 매혹을 위한, 모호함을 위한, 도로(徒勞)를 위한, 의미심장하지 않음을 위한. 고백이란 그것을 취소할 때에, 가장 솔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말들이 끌고 가는 만리장성 축조의 도로.

키브라, 기억의 원점

보르헤스는 「신학자들」이란 단편에서 이렇게 썼다. “서재를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우렐리노는 소장하고 있는 책들 모두를 읽어 보지 못한 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간신히 그렇게 불릴락 말락 한 내 서재에도 더러는 아주 오래 묵은 더러는 갓 짠 오렌지처럼 싱싱한 죄책감들이 잔뜩 꽂혀 있다. 하지만 이건 상황이 좀 나은 편이다. 내게는 ‘읽어 보지 못한’이 아니라 ‘읽을 수 없는’ 책들도 존재한다. 죄책감이 아니라 천형(天刑)과 같은 책들. 내 늘 부끄러운 절망 혹은 쾌락(주이상스?)의 근원. 감히 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는 나를 위해서 보르헤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다. “컴퓨터에 글을 쓰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역시 쓰다 만 글들 모두를 마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내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에도 역시 더러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더러는 그 부끄러움의 추억이 또렷한 죄책감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하드 속 죄책감은 서재 속 죄책감보다 더 쓰라리고 더 탈출하기 쉽지 않다. 나는 이제 막 내 하드 속 죄책감 하나를 집어 감옥 속에 수감했다.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감옥. 사람은 늙으면 까닭 없이 친절해지는 법이다. 아니, 어쩌면 친절해질 만한 일이 늘어나는 것일 수도.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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