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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문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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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징용 조선인은 전쟁 소모품이었다>

대한민국의 주홍글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6·25전쟁 70주년인 2020년 6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이었다. 6·25전쟁의 수수께끼를 주제로 ‘이상한 전쟁’ 이야기를 쓰면서,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많이 죽은 전쟁이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전화(戰禍)에 민간인이 휘말리게 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전사자의 5배에 달한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6·25 공식 전사자는 국군 유엔군을 합쳐 17만 5천여 명이다. 그러나 민간인 사망자는 100만 명을 헤아린다. 100만이라는 수는 여러 유형으로 죽은 사람들의 전체 추계다. 전쟁 중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인공에 협조한 부역자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에 의하여 학살된 사람이 제일 많았다. 그 다음이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훈련소 이동 중 또는 교육 중 굶어 죽거나 병사, 또는 동사한 사람들이다. 인공 시절 공산당에 의하여 반동분자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도 수만 명에 이르며, 피란 길이나 주거생활 중 유엔군 폭격에 의해 죽은 사람들도 많다. 또 군경의 공비토벌작전 때 빨치산과 접촉했거나 협조한 혐의로 몰려 피살된 사람, 수복 후 민간인끼리의 보복살해와 사형(私刑) 등으로 인한 사망자도 적지 않다.(중략) 일상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런 불만은 시시각각 터져 나오는 사건과 갖가지 이슈들의 물결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 버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각의 기회가 찾아왔다. 국가권력이 그 많은 국민을 참살하고도 쉬쉬하면서 사건 자체를 덮어버렸고, 억울하다는 유족들의 절규를 빨갱이로 몰아 틀어막은 사실을 알고부터 언론 종사자로 살아온 경력을 숨기고 싶어졌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그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 1980년대 후반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걸 들추는 일 자체가 반체제, 반국가적 행위로 인식되었던 탓이다. 근년 현대사 재조명 붐이 일면서 그 사건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시작되었고, 과거사를 밝혀내 사건을 청산하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조금씩 진상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힘입은 바 크다. 미력하나마 사건기자 출신 언론인의 눈으로 사건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 보고, 현장을 찾아 오늘의 그 자리를 스케치해보고 싶었다.

징용 조선인은 전쟁 소모품이었다

우리는 징용이 일본 본토에서만 있었던 일로 기억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국 군대와 맞붙어 싸운 중남부 태평양과 북태평양 여러 섬, 시베리아 최북단 지구 끝까지 끌려갔던 일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전후(戰後) 소련과 국경을 맞댄 만주, 사할린, 쿠릴열도(치시마 열도)에 있던 사람들이 소련군 포로가 되었던 일을 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전장(戰場) 일선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열에 일곱 여덟은 돌아오지 못한 일도 그렇습니다. 징용 갔던 사람들이 왜 돌아오지 못 했느냐고 묻습니까? 전투 훈련을 받아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왜 전장 일선에서 죽었느냐고 묻습니까? 그들은 상상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극한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내몰려 떼죽음을 당한 일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는 일본군에게 살해당하고, 굶고 병들어 죽은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본 병사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소련군과 연합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북쪽 끄트머리 강제노동수용소까지 갔다면 믿겠습니까? 혹은 돌아올 길이 없어 전투 현지에 정착했거나 호주, 하와이, 미얀마, 중국, 베트남에 끌려가 죽었거나 정착했다면 믿겠습니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그때 무수히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광복 80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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