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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해외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국적:아시아 > 일본

출생:1941년, 일본 효고 현 아마가사키 시 (사자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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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힘과 교환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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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

옛날은 ‘근대문학’이 자명=자연이 아니라 역사적인 제도라고 말해야 했지만, 오늘날 '근대문학'은 그저 역사적일 뿐이다, 즉 이미 과거의 것이라는 의미로서 말이다. 나 자신도 문학현장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근대문학의 기원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면 최근 1세기 동안 문학이 왜 그토록 큰 의미를 가졌는가, 그리고 왜 지금 그것이 사라졌는가를 명확히 해 둘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기원'이 다른 형태로 드러날 것이라고 여겼다. 이 책에 실린 논문과 강연은 이런 재검토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네이션과 미학

나는 1998년에 어떤 인식을 획득한 후 '탐구3'을 폐기하고, 새로운 구상하에서 그것을 다시 썼다. 그것이 '트랜스크리틱'이다. 그것은 그때까지 써온 내셔널리즘론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나는 '트랜스크리틱'에서 근대의 자본=네이션=국가를 서로 다른 종류의 교환형식이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결합된 것으로 파악하려고 했는데, 그와 같은 시점에서 본서에 실린 이전의 내셔널리즘론을 대폭 개고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트랜스크리틱'보다 빨리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 속편이다. - 지은이 후기에서

네이션과 미학

근대일본의 담론은 근본적으로 서양과 일본이라는 대비, 또는 좀더 근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대비에 기초하고 있다. 즉 서양이나 중국을 ‘거울’ 삼아 반성하는 모양을 취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자민족중심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거울’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진짜 반성이 아니다.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한국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담론에서 조선은 옛날부터 무시되어 왔다. 중국문화(문자?제도?사상)는 사실상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전래되었다. 도쿠가와(?川)시대의 지배적 학문인 주자학만 하더라도 조선주자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실이 완전히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 그래서 나는 한국을 끌고 들어오면 이제까지의 반성에 존재하는 맹점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열쇠를 ‘문학’이라는 문제에서 구했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은 의식적인 반성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반성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것을 ‘일본정신분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덧붙여 한국인도 중국과의 관계에서만 자기를 본다는 점에서 일본인과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변경에 있는 일본을 업신여기고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은이의 한국어판 서문에

문자와 국가

나는 이 강연들을 1992년 걸프전쟁 전후에 행했다. 그때 일본은 제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참전(설령 돈을 대는 것뿐이었다고 하더라도)했다. 그때 나는 오히려 그 이후에 생길 전쟁 앞에 서있다고 느꼈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걸프전쟁하의 문학자'라는 인터뷰에서 서술했다. <전전>의 의식은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그 후로 나는 그때까지와는 다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자주적 헌법에 대하여'라는 강연이 보여주는 것처럼 나는 당시까지 무관심했던 일본의 헌법(9조)에서 보편적인 의의를 보게 되었다. 또 동아시아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커미트commit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이 책에 있는 것처럼 일한작가회의의 출석이다. 되돌아보면, 내가 이상과 같은 일에 진지하게 몰두했던 것은 <전전>에 존재하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 이후 내 사고의 전부는 그야말로 ‘<전전>의 사고’이다. 무엇에 대해 쓰더라도 그러하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문학론집

나는 1969년에 문학비평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십여 권의 책을 냈다. 하지만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을 쓴 이후로는 서서히 현장에서 멀어져 사상가로서의 작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요즘 내 책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문학비평가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어도 내 문학비평을 읽은 적은 없을 것이다. 설령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과거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서이지 문학비평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나는 그러한 독자들의 수고를 덜기 위해 문학비평을 한 권으로 정리해두고 싶다고 예전부터 생각해왔다.

사상적 지진

『사상적 지진』에 수록된 것은 나 자신이 읽고 ‘이 정도면 됐어’라고 생각한 것일 따름이다. 그렇게 선택한 것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하나의 주제가 관통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은 「지진과 칸트」라는 강연에 개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1995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에 의해 뒤흔들리게 되었다. 한신 대지진·재해, 그리고 그것과 거의 동시기에 발각된 옴 진리교 사건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수개월 뒤에, 나는 서울에서 열린 건축가 국제회의에서 「지진과 칸트」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떤 뜻에서는 지진이 나를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설로부터 탈각시켰다고 해도 좋겠다. 당시는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노골적인 파괴destruction 앞에선 그저 지적인 유희에 불과한 거라고 생각되었다. 나의 『트랜스크리틱』이라는 작업은 거기서 발단한다. 이 지진이 초래한 여러 문제들은 이후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16년 후에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회귀해 왔다. 동일본 대지진?재해가 그것이다. 이 지진이 일본의 사회를 바꾼 것은 틀림없다. 예컨대 데모가 흔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나는 2008년에 「일본인은 왜 데모를 하지 않는가」라는 강연을 했다. 지진의 결과, 일본은 ‘사람들이 데모를 하는 사회’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런 변화의 파문을 대만의 ‘해바라기 혁명’(2014)에서도 발견했었다. 다른 한편에서 나는 동일본에서의 쓰나미에 의한 대량의 사망자를 보고 한신 대지진·재해 이후 읽었던 야나기타 구니오의 『선조 이야기』를 다시 읽었으며, 그렇게 『유동론』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외의 다른 강연도 모종의 형태로 ‘지진’과 이어져 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이 책에 ‘사상적 지진’이라는 이름을 새겨 내놓게 됐던 것이다.

세계공화국으로

이제까지 작업에서 나는 칸트나 마르크스의 가능성을 그들의 텍스트 독해를 통해서 제시하려고 했다. 즉 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보다 타자의 텍스트로 하여금 그것을 말하도록 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트랜스크리틱>은 문학비평(크리틱)의 연장으로서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술한 것은 더 이상 칸트나 마르크스의 텍스트 내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와 같은 작업을 하기 시작함과 더불어 이전보다도 더욱 칸트나 마르크스가 각기 직면한 문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마르크스는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경제적 하부구조의 측면에서 보았다. 그것은 ‘생산양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 경우 국가와 네이션은 관념적인 상부구조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생산양식’이 바뀌면 자동적으로 해소된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운동은 주로 국가와 네이션의 문제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 결과, 역으로 정치적ㆍ관념적 상부구조의 자립성을 강조하는 관념론적 경향이 팽배해졌다. 그에 반해 <세계사의 구조>는 경제적 하부구조의 측면에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로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단,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이라는 경제적 하부구조 측면에서 말이다. -<세계사의 구조 개관>에서

유동론

“내가 야나기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던 것은 (…) 그는 초기에 ‘산인’(수렵채집민적 유동민)을 중시했었음에도 후기에 그것을 포기하고 정주농민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고 간주되었다. 분명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야나기타가 산인적인 유동성을 부정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부정했던 것은 유목민적?팽창주의적인 유동성이었다. 이 책 ≪유동론≫에서 내가 논했던 것은 그런 사정이었지만, 그것을 이론적으로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중국에서의 강연 초고인 ?두 종류의 유동성?을 보론으로 덧붙였다. 독자들은 오히려 그 보론을 처음에 읽어주시길 바란다.”

윤리 21

“내가 칸트에 대해 생각한 것은 소련이 붕괴하고 ‘역사의 종언’이 이야기되던 시기이다. 이 책을 쓰던 시기까지도 칸트는 마르크스주의자, 실존주의자, 구조주의자, 포스트구조주의자, 과학사가, 프로이트파, 니체파 즉 대부분의 사상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야유를 당하는 대상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을 쓴 시점에서 나의 칸트론은 현대사상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또 그것을 각오하면서 쓰고 말한 것이다. <후기>(1999년)에 쓴 것처럼 이 책은 1994년 한일문학심포지엄에서 <책임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제국의 구조

내가 ‘제국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동기로는 몇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동아시아에서 살면서 생각해온 경험에서 나오고 있다. 나는 서양의 학문을 배웠는데, 거기서 상식으로 간주된 사항들에 의문을 품었다. 예를 들어,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념은 동(중국, 인도)에서 발하여,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마를 거쳐 유럽에 이르러 실현된다. 그의 관념론이 부정된 후에도 이와 같은 관점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나 동양적 전제국가 이후 고전고대(그리스로마)가 이어지고 있다. 막스 베버도 기본적으로 헤겔적 문명의 서점설(西漸說)을 따르고 있다. (……) 아렌트는 제국과 관련하여 뛰어난 통찰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로마에서 처음으로 제국이 생겨난 것처럼 생각했다. 그녀도 헤겔 이래의 서양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제국 이전에 페르시아·이집트에 제국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기 중국·인도에도 제국이 존재했고, 또 그 후의 몽골제국은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검토되지 않았다. 동쪽의 나라들은 동양적 전제국가로 정리되어왔다. 현재도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보여주는 것처럼 로마제국이 제국의 이념으로서 간주되고 있다. (……) 구체적으로 제국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서아시아에서는 수많은 제국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져서 사료가 충분히 남아있지 않은 데에 반해, 중국에서는 그것이 역사로서 쓰였고 또 음미되어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자백가의 책에는 제국을 초래한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중국의 제국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나는 1980년대부터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일본문화·사회론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본문화를 근대 이전은 중국, 근대 이후는 서양과의 비교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름을 들자면, 다케우치 요시미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론이 그것이다.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은 중국과의 비교만이 아니라 한국과의 비교가 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철학의 기원

나는 <세계사의 구조>에서 교환양식D가 보편종교로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환양식D가 종교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나타난 적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최초의 사례를 이오니아의 정치와 사상에서 발견했다. 다만 <세계사의 구조>에서는 그에 대해 충분히 전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속편인 이 책에서 그 과제를 수행했다. -부록, <<세계사의 구조>에서 <철학의 기원>으로>에서

트랜스크리틱

이 책에서 내가 보여준 몇 개의 제안은 단지 이론적인 가설일 뿐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람들의 실천적인 음미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음미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히려 나는 이를 계기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논의할 것을 기대한다.

헌법의 무의식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오랜 전쟁시대에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취했다. 대외적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에 의해 파괴된 조선왕조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재건하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조선통신사 제도이다. 도쿠가와 쇼군(將軍)의 교대 때마다 그들이 일본에 와서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전했다. 조선의 주자학이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정통적인 학문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유교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한 평화사상이다. 법이나 무력이 아니라 예악(禮樂)에 기초한 평화사상이다. ‘도쿠가와의 평화’는 이와 같은 유교와 분리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2005년 고려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식전에 초대되어 김우창 교수와 함께 평화에 관해 강연을 했을 때이다. 나는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 대해 말했고 김 교수는 유교가 평화사상으로서 가진 의의에 대해 말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도쿠가와(德川) 시대 초기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조선통신사 중 한 명이 일본에 갔다 온 뒤 “이제 일본은 괜찮다.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일본은 유교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내가 유교와 도쿠가와 바쿠후에 대한 관점을 바꾼 것은 실은 그때부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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