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

이름:이호동

최근작
2017년 3월 <전력질주>

이호동

전 발전노조 위원장

이호동은 포항에서 태어났어요. 가난을 이겨 보려고 초·중·고·대학을 장학금으로 다닌 고학생이었죠. 고등학교 1학년까진 육상부로 뛰기도 했어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인문계고 3년 장학생 자격을 반납하고 수도전기공고를 국비장학생으로 다녔어요. “니 엄마를 부탁한데이”라는 아버지 유언에 따른 겁니다. 약속대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어요.
그의 평생에 걸친 꿈은 장학회를 설립하는 거예요. 누군가의 시혜처럼 포장되는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하면서 깨달은 게 있었죠. 학생 개인계좌로 무기명 입금되는 그런 키다리 아저씨 장학재단을 만들려고요. 몇 푼이 될지 모르나 저자 인세 전액을 장학금과 해고자 후원금에 보탠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호동은 1985년 양말공장에서 생애 첫 해고를 당한 뒤 30년 넘도록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지요. 1988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합니다. 2001년 한전 울산화력지부 위원장을 거쳐 같은 해 발전부문 분할로 만들어진 한국발전산업노조 초대위원장이 됐어요. 2002년엔 전력산업 민영화에 반대하며 38일간 파업을 이끌었고요. 해고되고 수배되고 구속됐지요. 2004년에는 민주노총 공공연맹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전력질주>는 전력산업 민영화를 온몸으로 막았던 2002년 그날을 되새기는 비분강개 징비록입니다. 발전파업으로 해고된 348명 중 유일하게 복직하지 못했지요. 2005년 공공연맹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해고자·비정규직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해요. 그 후 10년 넘게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높이 솟은 철탑과 굴뚝에서 해고자·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며 풍찬노숙했어요.
현재는 민주노총 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전해투)와 발전노조, 공공운수노조 지도위원을 겸하면서 다수의 노동운동단체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노동운동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요.  

대표작
모두보기
저자의 말

<전력질주> - 2017년 3월  더보기

[들어가며] 어린 시절 달리기를 곧잘 해서 고1 때까지 육상을 했다. 단거리보다는 중장거리 위주로 달렸다. 운동장 트랙을 끝없이 돌았다. 학교 밖에 나가 특정 지점까지 달려갔다 오기를 반복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자전거 타이어를 묶어 배에 걸고 뛰기도 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면서 하늘을 보면 희뿌옇게 바랬다. 인내를 배웠던 시절이다. 그런 경험이 발전노조 파업 때 기자로부터 “파업을 이끄는 위원장의 개인적 장점을 하나 들어 달라”는 질문에 “스타트는 느려도 스퍼트는 강해요”라는 대답을 한 이유인 것 같다. 15년 전, 2002년은 절망의 벽 앞에서 기적을 바라는 심정이었다. 정면돌파 외에 우회로는 없었다. 작심하고 시작한 투쟁이었다. 이 책은 한국 사회 공공성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던 시절 급조된 정부 정책의 철회를 위해 싸웠던 이야기다. 조직의 명운을 걸고 개인적 인생을 걸었던 싸움의 기록이다. 공식적 기록과 함께 주관적 기억도 덧붙였다. 주관의 객관화 과정에서 부끄러운 기억보다 자랑스러운 기억이 도드라질 수 있다. 인지상정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공기업 민영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나라를 살린다며 전 국민이 장롱 속에 있던 돌반지·결혼반지 같은 금붙이를 있는 대로 내놓던 시절이었다. 공기업 민영화만은 안 된다는 시민사회의 염원은 현실에서 밀리고 무너졌다. 마지막 보루였던 전력노조 집행부는 직권조인을 해 버렸다. 2000년 12월 23일 전력산업 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2001년 4월 민영화 준비를 위해 발전부문이 5개사로 분할됐다.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2년 신년벽두부터 민영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발전노조 설립 7개월 만의 파업이었다. 이 땅에서 전력산업이 시작된 지 104년 만의 전면파업이었다. 2002년 2월 25일 철도·발전·가스 3개 노조 동맹파업은 그렇게 역사에 실체를 드러냈다. 38일의 파업은 세상을 움직였다. 기적 같은 여론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 2003년 3월 말 정부의 민영화 잠정중단 발표가 있기까지 1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당연히 후순위 분할민영화 대상이었던 배전분할도 중단됐다. 이후 기업공개(IPO) 방식이 시도됐다가 다시 중단됐다. 2008년 6월 촛불 앞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물·전기·가스·건강보험은 민영화하지 않겠다”는 대국민 선언을 했다. 민영화 중단 이후 전력산업 방향을 놓고 다양한 연구와 논쟁이 이어졌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세월 15년이 지나고 있다. 당시 민영화됐다면 극소수 가진 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이 에너지기본권을 향유하지 못하고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난 15년 동안 외형상 전력산업의 주력은 공적 소유와 운영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소유체제는 ‘공적 소유’가 필연적이다. 운영체제의 ‘공적 운영’ 형태는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전력산업에 대한 미래지향적 논의와 결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은 공론화 과정도 없이 2016년 6월 IPO 방식을 통한 민영화 수순을 밟았다. 같은 해 12월부터는 IPO 주관사 선정 등 구체적 절차에 착수했다. 2017년에 2개사, 2018년까지 나머지 3개사를 상장하겠다는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는 전력산업을 결국 해외자본이나 국내 재벌의 품에 안겨 주려는 속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5년의 논란과 진행 과정을 원천무효로 돌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박근혜 정권의 시대역행적 국정운영은 전력·에너지산업 소유와 운영문제에서도 똑같았다. 무데뽀로 밀어붙였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지난 15년간 발전노동자들의 기적 같은 승리를 파업 당시의 위원장으로서 기록하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 공식적인 백서가 있으니 먼 훗날에 좀 더 객관화되면 그때 기록하겠다고 미뤄 왔다. 하지만 MB정권의 노조파괴 공격으로 노동조합의 주체적 조건이 달라졌고, 박근혜 불통 정권의 전력산업 설계가 급격하게 달라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미루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정리돼 있던 자료와 기억을 토대로 역사적인 동맹파업과 발전노조 조합원들의 역정을 책으로 엮기로 했다. 연대했던 이 땅 노동자 민중의 승리를 기록하고 새로운 전력·에너지산업의 미래 설계를 위해 출판을 결정했다. 전력질주(電力質主)를 화두로 붙잡고 필자와 발전노동자들이 15년 동안 전력질주(全力疾走)를 했던 기록을 정리하는 동안 박근혜 정권은 민영화를 강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1,500만 촛불항쟁과 국민의 힘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됐다. 필자는 적폐청산의 절박한 심정으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공동대표단으로 활동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적폐청산과 새로운 희망의 계기가 되기를 빈다. 부족하지만 이 책이 한국 전력산업 사유화 정책을 폐기하고 공공성을 강화하는 데 조금이나마 쓰임새가 있기를 바란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전력과 가스 등 에너지산업 민영화 정책이 중단되기를 희망한다. 사유화는 여기서 즉각 멈춰야 한다. 동시에 철도산업을 포함한 공공부문 민영화 정책도 폐기되기를 고대한다. 국가기간산업 민영화금지법과 공기업사유화금지법이 제정되는 날을 상상하면서 독자들의 관심과 격려를 기대한다. 2017년 3월 10일 국정농단과 전력산업 민영화를 재추진한 박근혜가 파면된 날에 이호동 드림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