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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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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소강 시선>

소강

양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셋째 아들로 당시 가장 큰 문학 집단의 영수로 있으면서 궁체시의 창작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궁체시는 양대뿐만 아니라 진(陳), 수(隋), 초당(初唐)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창작되면서 문인들에게 애호되었는데, 이는 소강의 문학관과 그가 이끌던 문학 집단의 창작 활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소강은 양 천감(天監) 2년(503년) 10월에 현양전(顯陽殿)에서 태어났다. 그는 2세(천감 3년, 504년)때 왕자로 책봉되어, 4세(천감 5년, 506년)부터 28세[중대통(中大通) 2년, 530년]까지 진안왕(晉安王)으로 있었다. 29세(중대통 3년, 531년)부터 46세[태청(太淸) 2년, 548년]까지는 황태자로 동궁에서 생활했다. 그 후, 47세(태청 3년, 549년)부터 49세[대보(大寶) 2년, 551년]까지 2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진안왕, 황태자, 황제라는 뚜렷한 신분상의 변화를 겪었지만 황제로 재위했던 기간이 너무 짧아서 황태자로 동궁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과 풍격(風格)상으로 큰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문학 활동은 동궁 생활을 분기점으로 크게 진안왕 시기와 황제 시기를 포함한 동궁 태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시기는 문학 집단의 규모와 문학 활동 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진안왕 시기는 4세(천감 5년, 506년)부터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있던 28세(중대통 2년, 530년)까지다. 소강은 4세에 진안왕으로 봉해져 8000세대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진안은 지금의 복건성 남안현(福建省 南安縣)으로, 소강이 자사(刺史), 장군(將軍), 도독(都督) 등을 역임했던 여러 지역을 포함하는 지명이다.
<양서(梁書)>의 기록을 보면 소강은 6세(천감 7년, 508년)부터 글을 지었으며, 7세 때 이미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리(徐?)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스승인 서리 시풍의 영향으로 염정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11세 때부터 공적인 일을 친히 처리하고 지방의 공무를 잘 처리하여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이때 소강을 수행했던 유견오(庾肩吾)는 소강의 문학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옹주(雍州)뿐만 아니라 동궁까지 소강을 수행하며 문학 활동을 함께했다. 이 시기에 소강은 나이가 어리고 문학적인 역량이 부족하여 습작 수준의 시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호소하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소강은 21살에 옹주자사가 되어 20대의 대부분을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보냈다. 궁체시에 민간의 가무를 묘사한 작품이 많은 것은 소강이 가무의 고향인 옹주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탁월하게 지방 행정을 처리하여 다른 곳으로 옮긴 후까지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문학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그는 지방의 자사(刺史)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주로 여행이나 임지의 자연 경관을 읊은 산수시와 강남 민가를 모방한 염정시 몇 수와 변새시를 창작했다.
동궁태자(東宮太子) 시기는 29세부터 47세까지의 18년간으로, 531년부터 황제에 오르기 전인 548년까지를 말한다. 소강은 29세에 형 소명태자(昭明太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소명태자의 죽음은 그를 양 정치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지만, 모방의 차원에만 머물던 그의 문학적인 경향을 변화시켜 염정시풍의 많은 시를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삶을 정치 중심에서 문학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소강은 평소에 문학을 애호하여 동궁에 자유롭게 문인들을 초대하여 교제하면서 가볍고 에로틱한 시작을 즐겼다. 동궁태자 시기는 진안왕 시기에 단련된 문학적인 능력을 토대로 문학 발전에 앞장섰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법보연벽(法寶聯璧)>, <옥대신영(玉臺新詠)>과 같은 책을 편찬하도록 명령했으며, 34세에는 <여상동왕서(與湘東王書)>를 써서 당시의 문학적 경향을 논했다. 그는 여기에서 유가의 교조적인 창작을 반대하고 시를 지을 때 자유롭게 감정을 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창작된 소강의 문학 작품은 염정과 영물, 유연 등 궁정 생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황제 시기는 549년부터 551년까지로 황태자에서 황제로 등극한 2년간이다. 이 시기 소강의 정치적 지위는 높아졌다. 그러나 문학적인 성취에서 보면, 수백 편의 시문을 지었지만 현존하는 작품들이 적어 황태자 시기와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유폐된 후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노래했던 그의 많은 시문들은 사후에 그것을 본 왕위(王偉)에 의해 삭제되었다. 소강은 47세 되던 해에 후경(侯景)에 의해 태종(太宗) 간문제(簡文帝)로 추대되었다. 후경은 실권을 가지고 소강을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었으며, 태청(太淸) 5년, 대보(大寶) 2년(551년) 8월, 간문제를 폐위하고 진안왕으로 강등시켜 영복성(永福省)에 유폐시켰다. 그해 겨울 10월, 후경은 왕위, 팽준(彭儁) 등을 보내 소강을 살해했다. 그때 소강의 나이 49세였다. 소강은 2년간 황제로 재위했으나 반년 동안만 실제로 양나라를 통치했다. 나머지 기간에는 후경의 지배 아래 유명무실한 황제로 있었기 때문에, 의례적인 경우에 국한된 기록만이 남아 있다. 유폐된 후 그가 지은 많은 작품들 중에 부(賦) <연주(連珠)> 3수, <피유술지시(被幽述志詩)> 4편, 절구 5편, <제벽자서(題壁自序)>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고문 190여 수, 시 285수가 있다.
소강은 정치보다는 시인으로 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소강의 진안왕 시기는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문인들과 폭넓게 교제한 문학의 단련 기간이었으며, 동궁태자 및 황제 시기는 문학적인 성취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안왕 시기의 문학에 대한 관심, 서리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의 폭넓은 교제와 지방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궁태자가 된 후에 그의 문학적인 생애를 대변할 수 있는 염정시를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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