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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예술

이름:오세창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864년, 서울 시동(詩洞: 청계천 2가) (게자리)

사망:1953년

최근작
2022년 5월 <근역인수>

오세창

역관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넉넉한 집안 형편과 높은 학문의 분위기 속에 성장하였고, 8세 때부터 부친의 친구인 유대치(劉大致: 1831~?. 본명은 鴻基, 의원)를 스승으로 모셔 1879년(16세)에 역과에 합격하였다.

1882년(19세) 임오군란 직후 9월에 후원주위청영차비관(後苑駐衛淸營差備官)이라는 벼슬을 받아 창덕궁 후원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사들의 통역을 맡았다. 1886년(23세)에 사역원직장에 임명되었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공사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귀국 후 개화파 역모에 연루되어 1902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이때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4년 뒤인 1906년에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만세보」를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였으니, 이때부터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민주의원·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동란 중 피난지 대구에서 사망하여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다.

일찍부터 서화골동의 가치를 인식하여 국외로 유출되는 서화를 동분서주하며 수천 점을 구입하였다. 또한 간송 전형필이 10만 석의 사재를 헐어 골동서화를 수집하는데 감식안을 제공하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고서화 명품 가운데 상당수가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를 거쳐 수집된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수준 높은 감식안을 더욱 발전시켜 민족문화의 유산을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서화의 수장뿐만이 아니라, 저술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문집이나 국고문헌(國故文獻)에서 인명.미술사 자료를 두루 모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년)을 출간하여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명화(名畵) 251점을 모아 <근역화휘(槿域畵彙)>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문인화가 830여명의 도장 3,930여방을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1937년)를 만들었다. 위창은 이런 여러 편의 대저(大著)를 만들어 불모지인 우리 미술사학에 기초적인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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