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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작가파일 > 알라딘이 만난 작가들 : 천성호
2009-03-31

  '야학'을 아시나요? 800여 페이지에 가까운 묵직한 책을 펼치면서 '야학'을 아는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야학활동가라는 직업을 갖고 소외된 현장에서 일해온 저자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습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던 야학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가는 모습이지만, '배움을 통한 희망'이라는 야학의 메시지는 지금도 소외된 이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로망입니다.

개화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야학운동의 역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야학운동사-자유를 향한 여정 110년>의 저자 천성호 님을 만났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야학 교사로 일해온 천성호 님은 십수년을 야학 현장에서 일해온 야학운동가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해온 사람입니다. 순박한 아저씨같은 모습 뒤로 실천가의 묵직한 뚝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자료 제공 | 도서출판 학이시습)


인간적 공동체의 마지막 보루, 야학

알라딘 : 독자를 위해 자기 소개를 해주세요

천성호: 1994년부터 야학을 해왔어요. 구로섬돌야학에서 시작했고, 대학(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을 졸업한 뒤에는 남부야학에서 10여년 상근을 했어요. 몇 년전 그만 두고 현재는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두 딸의 육아를 전담하면서 야학 관련 단체에서 관련 연구와 강의도 하고 있어요. 딸이 여섯 살, 두 살인데,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육아는 제 몫입니다.

알라딘 : 현장 활동을 그만둔 이유는?

천성호 : 첫째 아이를 낳고 애를 봐줄 사람이 없었어요. 남의 손에 맡길 수도 없고 해서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저는 육아를 책임지기로 했지요. 그러다가 둘째도 낳게 되었구요. 일반적인 가정과는 거꾸로이지요.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아이를 본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어요. 아이를 보는 것 자체도 힘들지만, 남자가 왜 돈을 안 벌고 애를 보냐는 고정된 선입관으로 보는 시선때문에 특히 더 그래요.

알라딘 : 요즘 야학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나요?

천성호 : 기본적으로 초, 중, 고등과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요즘은 한글을 모르는 사람, 장애인, 결혼한 이주 여성, 학교 밖 아이들이 야학에 와요.

알라딘 : 아마 30,40대 이상 되는 분들에게는 익숙한 말일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야학’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에 ‘야학’이라는 말이 사라진 것 같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야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었다고 할까요?

천성호 :일제 강점기 야학은 일종의 마을 공동체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 최근까지 야학에는 그런 영향이 일정 부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마을, 또는 지역의 공동체가 급격히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것 같아요. 개인주의가 중심이 되는 현 사회에서 야학은 인간적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닐까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야학에 오면 “야학의 공기는 사회의 공기와 다르다”라고 말해요. 야학의 공기는 인간 냄새가 나는 공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야학의 단절이 아니라 야학보다 현 사회가 개인 중심 사회로 변하면서 과거부터 존재했던 사람, 마을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라고 봐요. 그것이 야학을 좀더 고립적으로 만들었다고 보는데, 야학의 존재는 무너져가는 현 사회에서 인간과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배운다는 것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알라딘 : 아직도 야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천성호 : 시대가 변해도, 가난한 사람들, 교육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항상 있는데, 이 사람들에게 배움을 통해 삶의 희망을 만들어주는 것이 야학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해요. “배운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야학’은 어쩌면 이 사람들에게 ‘희망’과 동의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알라딘 : 야학활동가로 살아오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천성호 : 야학을 하면서 저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많이 생각했고, 배우게 되었어요. 저는 사랑이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봐요. 제 나름대로 사랑을 말한다면 “떠날 수 없는, 함께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야학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어요.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기위해… 그래서 야학에 함께 머물러 있었어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알라딘 : 대부분 야학 교사를 학생 때 잠시 봉사하는 코스로 거쳐가는데 상근 활동가가 되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천성호 :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방황(?)을 했는데,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야학을 떠나야 할지 고민했어요. 아는 선배의 권유로 잠시 조그만 노동조합에서 지원활동을 했고, 노조에서 상근을 권유했는데, 그곳은 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야학의 상근자가 조금 늘었는데, 그때는 야학에 상근자라는 개념이 별로 없을 때였어요. 이리 저리 고민하다가 야학연구단체인 <야학21>에서 편집위원들이 십일조를 내기로 결의했고, 그 자금으로 남부야학에서 상근을 했지요. 얼마를 월급으로 받았는지는 비밀입니다.^^ 편집위원들이 저의 지속적인 야학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공동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죠.

남부야학을 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난곡에 있었고, 교육 문제를 지역에 뿌리를 두고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의 삶의 토대가 되는 지역이 바뀌지 않고서 가난과 교육의 문제를 풀기 어렵다고 봤어요. 그래서 저는 지역의 공동체를 만드는 교육과 지역 운동에 많이 참여했어요.

알라딘 : 야학이 아직 있기는 하지만 점점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현장 활동가로서 느껴온 야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천성호 : 아무래도 대학생 교사들로 구성되는 것이 한계이자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삶의 중심이 야학이 아니라, 일종의 젊은 날 경험하고, 거쳐 가는 과정이기에 야학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이나 책임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워요. 당연히 야학은 혼란은 가중되고요.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야학의 생명력이 110년이나 이어온 것이 대학생들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거라고 봐요. 무료로 운영하는 야학에 이렇게 순수하게 자원 활동을 한 이들이 없었다면 누가 야학 교사를 했겠습니까?

다른 문제점으로 최근에 많은 야학이 정부의 지원이나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생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어요. 저는 야학의 중요한 정신중의 하나는 스스로 서 있는 자생력인데 만약 그 버팀목이 외부의 지원이라면 스스로의 자율성도 잃어버리고, 들러리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이외에 야학 교육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야학을 무료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거나 공간을 임대하는 데 드는 돈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라고 봐요.

알라딘 : 잊지 못할 학생이나 선생님이 있다면?

천성호 :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잊지 못합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학생이었던 한 친구(이름을 밝히면 안 될 것 같고)가 공장을 다녔는데, 야학을 나오면서 공장을 나가지 않았어요. 밥은 야학에서나 교사들에게 얻어먹고, 술을 먹기도 하고… 소위 ‘룸펜(실업자)’이 되었는데, 제가 그 학생을 시쳇말로 짤랐어요. 그만 야학에 나오라고. 직장에 다니고 안정되면 다시 나오라고 했지요. 졸업장을 주는 정규학교도 아닌데, 학생을 짜른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데… 그때는 심각했어요. 야학이 학생들에게 도움은 못 될망정, 망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친구는 야학에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가끔 만나서 술도 먹고, 같이 어울려 다녔어요. 그 친구와는 한 7~8년을 만났는데 참 힘들게 살았어요. 지금은 연락이 끊겼어요.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활동가로 일하려면 혼자 살아라

알라딘 : 야학 활동가로 일해 오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천성호 : 개인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 제일 힘들었어요. 또 활동을 하면서 제일 힘든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인 것 같아요. 사람들 대하는 것이 힘들어 지칠 때도 많고요. 야학을 그만두는 경우도 대부분의 이유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때문입니다. 흔히 ‘치인다’라고 하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가난입니다. 혼자 산다면 몰라도 가족들이 생기면 더 힘들죠. 요즘에 후배들이 야학을 계속한다고 하면 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 길이 너무 힘드니까요. 힘든 길로 밀어 넣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하려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해요. 가족들은 뭔 죄냐고요. 그래서인지 요즘 활동가들 중에 나이를 먹고서도 결혼하지 않는 활동가도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과부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가들이 스스로의 가난 속에서 건강한 정신을 갖고 올바른 실천을 하는 것 같아요.

알라딘 : 최근 브라질에 잠시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을 했나요?

천성호 : 두 달 동안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연구차 다녀왔습니다. 브라질의 사회, 문화와 말도 배우려고요. 프레이리 연구소를 방문하고, 인터뷰도 했습니다. 야학에서 교육의 철학과 방향을 생각할 때 파울로 프레이리는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렇지만 언어나 브라질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자 하고, 포르투갈어도 공부하고, 나름 준비를 해서 갔어요. 한국에서 가져간 프레이리 책도 연구소에 기증했어요.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프레이리를 연구하려고 상파울로의 연구소를 방문한 사람이 있느냐 묻었더니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대부분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많이 와요. 프레이리연구소는 상근직원만 80명 정도로 규모가 꽤 큽니다. 기업에서 많은 지원을 해준다고 해요.

브라질은 정말 빈부격차가 심해요. 빈민지역은 지금도 경찰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무법지대에요. 한편에서는 프레이리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자조적인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브라질에 있으면서 느낀 것인데 브라질이 한국보다 나은 것이 하나 있다면 아마도 문화의 다양성일 것 같아요. 한국은 너무 갇혀 있어서 그런지 문화나 사고가 굉장히 획일적인 것 같은데, 브라질은 가난하지만 문화가 참 다양한 것 같아요. 문화를 즐길 줄 안다고 해야 할까요? 또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포용력도 있는 것 같고요. 우리는 문화가 정말 획일적이고, 심할 때는 폭력적이잖아요. 참 답답하죠..

닭장에 갇힌 닭을 만드는 교육

알라딘 : 야학운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학력 불평등 사회는 더욱 공고해지는 것 같은데 교육운동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천성호 : 학력 불평등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본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요. 교육부를 없애려고 하다 마지못해 교육과학부라고 고친 것을 보면 위정자들이 교육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지 알 수 있어요. 저는 교육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이자 목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의 한국의 교육은 자유로운 존재는커녕 자본을 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계가 되는 교육을 하고 있어요. 국가가 이것을 장려하고요. 이것은 인간으로서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스스로 자본화된 인간의 이성과 행동은 끔찍하게도 사회의 모든 부분을 출세주의, 가족 이기주의, 경쟁주의로 만들어 버립니다. 공동체에 대한, 인간에 대한, 환경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든다면 인간은 자유롭게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어야 하는데, 닭장에 갇힌 닭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해 모이를 많이 먹기 위해 서로를 부리로 쪼으는 닭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회에는 희망이 없어요. 학력 불평등의 문제를 푸는 것은 인간이 좀 더 자유로운 영혼과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의 학력 불평등과 더 나아가서 교육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고,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장기적으로 모색하려 합니다.

지독한 현실을 깨트리고 싶었다

알라딘 : 오늘날 제도권 교육을 비판하며 다양한 종류의 대안적 교육 모델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야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천성호 : 야학도 일종의 대안교육이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대안교육은 많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중산층 이상을 위한 대안학교로 자리를 잡아 가는 것 같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는 보이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야학의 많은 역할이 있겠지만, 특히 지역의 가난한 아이, 청소년을 위해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교육?문화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한 아이들을 지역사회에서 공동으로 책임지고, 교육도 하고, 기술도 가르치고요. 그래서 이들이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교육? 문화? 지역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알라딘 : 야학의 존재 이유가 ‘배움을 통한 희망 찾기’였지만, 배웠다고 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사교육이다, 조기 유학이다 하며 자신의 학력을 높여가고 있지만, 정작 취업 혹은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과 연결시키는 데에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야학운동을 해오셨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천성호 : 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배웠어요. 그 사람들의 삶의 경험, 언어, 문화가 제 배움의 중심 교과서였어요. 저는 가난하게 살아왔어요. 10대 후반에 구로공단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공장의 형광등 불빛 아래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에 잠깐 나가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미칠 것같았어요. 단순히 햇살이 그리웠던 것이 아니라, 자유가 없어서 자유가 그리웠던 거였죠. 또, 야간에 철야 근무를 하다보니, 일하는 몸은 움직이는데 일하고 있는 나는 의식할 수 없는 몽롱한 상태가 되어요. 내가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일은 굉장히 슬프고도 폭력적인 경험입니다.

대학에 들어가 야학을 하면서도 틈틈이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공사 현장에서 일했어요. 그것은 저에게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했지요. 이런 노동의 경험을 통해 저는 머리로만 깨닫는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의 삶과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실천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야학에서 이론과 실천 어느 한 쪽에 쏠리지 않고 조화롭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야학에서 만난 학생들, 스스로 비참한 현실을 넘어서려고 노력했지만, 좌절하고, 실패하여 스스로 절망하는 모습을 볼 때 그렇게 만든 현실이 너무 미웠어요. 그래서 그 지독한 현실을 깨뜨리고 싶었어요.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야학을 하게 한 힘이었던 것 같아요.

1971년 1월에 태어났다. 세 살 때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식구들이 이사간 곳이 경상북도 문경이다. 아버지는 그가 열한살 때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그 후 갖은 고생을 하면서 4남 3녀를 키웠다. 그는 고등학교를 딱 1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친구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 봉제 공장에서 '시다'로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도 돈을 벌지 못하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조금씩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운 좋게 검정고시를 봐서 합격을 하고 대학에도 들어갔다. 대학생활 내내 야학활동을 하고 대학 졸업 후에도 어떻게 하면 야학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까 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다. 그 와중에서 <야학21>이라는 야학운동 잡지를 만드는 모임에서 5명의 편집위원들이 십일조를 내기로 결의하고, 그 자금으로 1년 동안 상근비를 지급한다고 결정했다. 그는 남부 야학에 들어가 최근까지 상근 활동을 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야학도 많은 변화를 겪은 요즘 그가 힘을 쏟고 있는 일은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연구와 그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한국야학운동사> 도서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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